연구활동

번역문

억제론, 맥과이어 (2006)

관리자 

  

 view : 748

*참고로 맥과이어 글(특히 시작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뒤에 ‘보조자료’(용어 설명)를 덧붙였다. 용어설명을 보고나서 이 글을 본다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평화통일연구소 주)

이 글은 1996년 8월, 핵무기 제거에 관한 캔버라 위원회의 보고서로 첫 출판되었다. 이 원문에 유일하게 추가된 것은 각주 5로,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이 실제로 가한 위협에 대한 미국의 공식 평가를 인용한 내용이다.

 

억제론

 

*번역: 평화통일연구소

맥과이어(2006년)

 

핵무기가 냉전 40년 동안 평화를 지켰다는 것이 서방에서 사회적 통념으로 되어 있다. 또한 핵억제 정책의 채택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두 통념 모두 다 증거가 없으며, 두 번째 통념은 심히 잘못되었다.

 

이러한 통념들을 정리하자면 우리는 핵 군비경쟁과 미국의 대소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저 이론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론적 이해를 배경으로 하면서 나는 억제 도그마(교리)가 서방의 이해와 세계 정치에 끼친 유해한 영향을 개괄한다. 또 나는 이러한 영향이 일반적인 상황에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그 개념에 내재한 것인가를 검토한다. 또 나는 ‘억제의 안정성’이라는 문제에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핵무기가 평화를 지켰다는 주장의 부당성을 하나하나 따져볼 것이며, 억제에 기반한 정책들이 장래에 어떤 지위를 갖게 될지를 점검한다.

 

배경

핵억제 이론은 순전히 서방의 개념이다. 지나치게 단순화하자면 핵억제론은 소련 본토에 감당할 수 없는 징벌을 가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소련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이는 1950년대 전반에 걸쳐 서방의 전략을 이론화하는 데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한 문제였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억제력은 미국의 보복의 확실성에 의존하는데, 1950년대 말경에 소련이 미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미국의 관심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처럼, 미국을 무장 해제시키려는 소련의 사전 계획된 공격의 위험에 대비하는데로 돌려졌다. 난공불락의 필요성에서 새로운 요소가 공격/방어 미적분에 도입되었으며, 극단적 형태의 최악의 사례 분석이 횡횡하였다.

 

소련의 부상하는 능력은 또한 핵무기의 재앙적 본성에서 유래하는 새로운 위험에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심각한 대치 속에서는 핵선제공격의 이점이 너무나 큰 나머지 신중한 국가 지도자는 상대국이 전쟁을 고려하고 있다는 단순한 의심만 들어도 핵공격을 감행하도록 끌릴 수 있는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론가들은) 대두되는 전략균형의 ‘안정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소련의 침략이 억제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요구는 일부 이론가들 한테는, 모스크바가 미국 스스로 1격(선제공격)을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해야(reassured, 보증받아야) 한다는 다소 모순된 요구에 의해서 충족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미국의 군비통제 체제의 지적 토대는 이러한 상호확증(mutual reassurance 쌍방이 상대의 보복에 의한 괴멸적 파괴를 두려워해 핵선제공격 즉 제1격을 삼가는 상황:역자 주) 필요성에 대한 인식 위에서 세워진 것이지만 그것(미국의 군비통제체제) 또한 억제 이론의 신조를 받아들이고 있다. 전략안정은 양측이 제2격(좀더 적절한 표현으로는 먼저 공격한 국가에 뒤이어 타격) 능력을 보유함으로써 성립되는데, 2격능력을 보유하게 되면 충분한 무기가 (적의)1격에서 살아남아 적국에게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가할 수 있게 보증한다. 그러나 확증 2격 능력은 확증교리(reassurance doctrine)의 요건 중의 하나일 뿐이다. 상호확증교리는 또한 어느 한 쪽한테서 2격 능력을 박탈할 수 있는 무기체계 배치(가령 MD)를 양측 모두 피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상호확증(mutual assurance)이 서방의 군비통제 이론의 토대를 제공하긴 하지만 미국의 군비통제 정책은 억제이론과 확증이론(reassurance)의 혼합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미국의 군사적 우위보다 군비통제를 바람직하게 보는 것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견해에서의 깊은 분열을 반영하였다. 이 분열이 두 대립하는 진영―군비통제 전략가들과 핵무기 전략가들―에 반영되어 있다. 양진영 내의 이념적 분파들은 서로 소통하지 않은 반면 양 진영의 활동적인 실용주의자들은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확증론자(reassurers)와 억제론자(deterrers)로서 본질적으로 같았으며, 이 두 관점의 혼합이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군비통제 정책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이것은 미소 모두 확증 2격 능력을 갖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고,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의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오랫동안 누려온 압도적 핵우위를 점차 상실해가자 이 정치적 중도파 역시 약화되었으며 양 진영은 더욱 소원해지게 되었다. 핵무기 전략가들은 점차 영향력이 커졌다. 그리고 핵무기 전략가 진영 안의 이념적 분파도 점차 중요해졌으며, 그들은 소련이 미래 어느 날 ‘취약성의 창’이라는 개념을 이용하려고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호 자살(상호확증파괴를 가리킴)을 미국의 안보의 토대로 삼는사고에 대한 환멸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1974년부터 미국의 정책은 점차 MAD(상호확증파괴)에서 상쇄전략으로 옮겨갔다. 1980년대 초까지 이 상쇄전략은 미국이 장기 핵전쟁을 수행하고 또 승리할 능력을 갖출 것−핵억제의 관점에서 계속 정당화된 정책−을 요구하였으며 또 미국이 모든 차원에서 ‘확전우위’(escalation dominance: 교전의 한 쪽이 확전의 현 수준에만이 아니라 이어지는 수준에서도 군사력의 우위를 계속 갖는 것)를 확보할 것을 요구하였다.

 

군비통제 협상은 협력적 노력이 아니라 제로섬 경쟁으로 여겨졌다. 1981~3년까지 중거리 미사일 핵전력과 전략무기 감축에 관한 미국의 뚜렷한 협상 목적은 군비 수준을 감축하는 합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국내 및 동맹국들의 여론을 달래고 소련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에 좌절하여 군비통제 진영의 이념적 분파는 실용주의자들과 결별하였으며 핵무기의 전면적인 동결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 핵무기의 전면적 동결이라는 사고는 뜻 밖에도 미국 전역의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다른 사태로 미국의 가톨릭 주교들은 국가안보 토대로서의 핵억제론에 대한 심각한 유보를 담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암묵적으로 핵억제론을 비난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전략적 방위구상(SDI, 스타워즈)이 1983년에 착수된 것은 이런 배경(핵무기의 전면적 동결의 인기나 핵억제론을 비판하는 주교 교서의 발표)하에서였는데 동결 운동에 대해 선수를 친 것이고 주교들의 도덕적 의문에 긍정적 반응(주교들의 의문을 수용해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의미임: 역주)을 내놓았다. MAD는 ‘공격 의존적’인 것으로 낙인이 찍혔으며 부당하게도 SDI—SDI는 미국의 영토적 불가침성을 복원하고 미국의 창의력을 활용해 우주 자체를 방패로 전환시키겠다는 것이다—와 비교되었다. 미국의 국방기관 안의 많은 사람들이 SDI가 핵억제의 필요성을 없애주고 핵무기의 제거를 가져온다는 공식 방침을 믿었을 리는 없다. 가장 널리 퍼진 논리는 SDI가 확증(reassurance)교리를 포기하긴 했지만 미국의 ICBM현장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보장함으로써 억제를 향상시키고 소련의 속임수를 방지해 줄 거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 배치 방패와 전면 보완된 전략 공격 미사일을 결합시켜 미국이 1950년대에 누린 군사적 우위를 회복할 가능성을 환영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전략적 우위와 우주 배치 무기를 이용하여 소련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미국이 모스크바를 단 몇 초 사이에 정밀 타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는 이들 무기체계들을 우주에서 조립하기 시작할 때 소련은 아무 대응도 않고 한가하게 놀고 있을 이유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다.

 

그 궁극적인 역할이 무엇이든지 간에 SDI는 ABM 조약을 위반하고 군비경쟁을 우주로 확장하며 그 과정에서 충돌의 새로운 원인들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연의 일치로 1985년 소련 지도자의 세대교체는 전략 논쟁에 참여하지 않아 현 상황−그 이론적 장점이 무엇이든 상관없이−의 숙명적 불합리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고르바초프)을 권좌에 앉혔다. 그는 국제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치적 사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군비경쟁의 작용과 반작용의 악순환의 고리를 깰 수 있는 정치적 권위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짧은 개요는 핵억제가 핵시대 외교정책을 위한 뭔가 절대적인 규범이 결코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오히려 핵억제 정책은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워싱턴의 오래된 논쟁의 한 영역에 불과하였다. 핵억제론의 핵심인 MAD에 대한 의존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공격을 받았으며, 1980년대 중반이 되어 공식적인 거부로 결말이 났다. 그런데 이런 방향 전환은 근원적인 교리(핵억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핵억제 교리의 이론상의 영향은 이 교리가 지나치게 비비꼬인 나머지 상대방의 똑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었다. 핵억제교리는 또한 ‘평화 보존’이나 ‘전쟁 억제’−모성애와 애플파이만큼이나 반대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와 같은 단순한 목표들로 변형될 수도 있었다. 억제 도그마의 단순한 형태와 복잡한 형태의 결합은 국교(국가종교)와 같은 지적 및 도덕적인 권위를 제공했으며, 그 결과는 똑같이 어리석은 것이었다.

 

억제 교리의 비용

핵억제의 주제에 관해서는 많은 변형이 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핵심 교리의 해로운 영향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4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는 추론의 추상성과 기본 이론−국제정치학보다는 수학이나 경제학에서 파생되었다−의 공리적 성격이다. 이런 특성은 합리적 행동−여기서 말하는 합리적 행동이란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기껏해야 비합리적이고 더 자주 불합리한 행동일 경우가 많지만−을 정의하는데로 이어지게 되며 적과 동맹의 정치 심리학을 연구하는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게임이론 모형을 선호한다.

 

둘째 특성은 제한전과 확전의 이론들이 구체적인 상황 하에서 소련의 대응이 어떠할 것인가에 관한 가정에 기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 논쟁에서 진정한 소련 이론가들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논쟁의 추상적 성격은 부분적으로 이런 소련이론가들의 불참 탓이긴 하지만 주로는 억제교리가 소련의 의도를 이미 정해진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능력만이 분석 대상이며, 소련은 군사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가차 없는 욕구를 지니고 있고 무엇보다도 유럽을 장악하려는 충동을 느끼고 있다고 주장되는 것이다. 억제 도그마의 이러한 두 측면(의도와 능력)은, 핵 기습 공격의 재앙적 결과에 대한 우려와 결합되는 경우, 극단적 형태의 최악의 분석을 조장하며, 소련의 행동 방침을 위협의 분석에 포함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행동방침을 상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략 연구와 그 외교정책의 상대는 ‘강인한 정신을 가진‘ 이론가들에 의해 지배되게 된다.

 

억제 도그마의 셋째 특징은 핵억제론의 근본적인 징벌적 기조다. 억제 교리는 손버릇이 나쁜 이웃을 유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문을 잠그고 창문을 막는 그저 수동적인 문제가 아니다. 억제교리는 소련과 화해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전면적인 파괴를 위협하는 적극적인 정책이다. 억제정책은 그러한 징벌을 가하겠다는 능력과 의지에 의존하며, 이런 태세를 신뢰성 있게 만드는 전제조건은 유권자들이 고도의 소련 위협을 계속 믿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전략적 군비통제의 밑바탕에 있는 확증(reassurance)이론은 핵억제 교리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며, 가차 없는 침략 충동에 대응할 필요성에 관한 억제론의 기본적 가정을 공유한다. 확증(reassuarnce)개념은 억제의 일정한 바람직하지 않는 부작용에 대한 대응으로서 출현했으며, 그의 관심은 핵무기 증강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 안정이라는 좁게 제한된 개념이었다.

 

외교정책

억제 교리는 미국의 외교정책의 발전을 저해했다. 억제 및 그 추론 그리고 봉쇄는 외교와 국방정책에서 지배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에 위협 인식은 1947~53년의 모양 그대로 남아 있다. 억제 교리는 이런 세계관(소련을 침략충동을 가진 적으로 인식하는 위협관)과 모순된 증거나 분석이 나오더라도 세계관(위협관)을 그대로 고수하게 하는 지적 틀을 제공했다.

 

위협 평가는 잘못된 차원의 분석에서 이루어졌다. 침략 충동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오직 소련의 능력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평가는 군사전술 또는 ‘대령’ 수준으로 전락되었다. 이런 류의 최악사례 분석은 우발사태 기획에는 적절하더라도 외교정책의 밑바탕에 있어야 할 정치·전략적 또는 ‘각료’ 수준의 분석에는 전적으로 부적절하다. 이런 보다 높은 수준(정치전략이나 각료)에서 1차적인 관심은 가장 가능성이 있는 사태인 것이며 적의 관심과 의도를 고려함은 물론이고 적의 능력과 정당한 요구 간의 균형까지도 고려하는 것이다. 적의 의도는 밤새 바뀔 수 있으므로 무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령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역사상의 기록은 국가 차원의 의도가 놀라울만큼 일관성이 있다는 것, 또 의도의 급격한 변화는 오로지 러시아 혁명이나 소련의 붕괴와 같은 중대한 정치적 변동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위협 분석에서처럼 억제 도그마는 외교정책 전문가들로 하여금 더 폭넓게 예비의 정책들까지 고려하는 고차원의 목표를 추구하게 하기보다는 소련 군사력의 봉쇄에 역점을 두게 하는 소지를 주었다. 만약 외교정책의 1차적 목표가 봉쇄라면 그 정책은 불가피하게 부정적일 것이다. 소련의 협력적 행동을 확보하려는 보다 폭넓은 목표를 가졌더라면 보다 건설적인 정책방안들이 선택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높은 수준에서 봉쇄가 중요한 보조목표가 계속 되기는 하겠지만 봉쇄는, 무역의 상호 의존성 증대, 상호관심 사안에 대한 협의강화, 심지어는 소련의 생활수준의 개선을 통한 기대 상승의 촉진 등과 같은 긍정적인 목표들에 의해 우회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의 데땅트 기간에 미국은 보다 차원 높은 목표를 채택했으며, 이는 보다 폭넓은 다양한 구상들을 허용하였다. 이 구상들은 미소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 혜택을 가져왔고 유럽의 동서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억제교리에 내재하는 소련의도에 대한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가정은 데땅트 정책의 밑바탕에 있는 가정들과 양립될 수 없었다. 억제력의 미적분은 ‘취약성의 창’을 드러내기 위해서 조작되었으며 그런 다음 보다 제한적인 정책으로의 복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

 

억제 도그마는 또한 미국의 위기 시 행동을 구체화하였다. 초기에는, 소련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고 이 압박감은 소련의 분별없는 침략 충동에 대한 핵심적 가정에 의해 조장되긴 하였으나 적어도 그런 위험은 인정은 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훨씬 큰 위험이, 억제가 실패할 수 없다는 미국의 가정−이 가정은 소련 사람들이 ‘뼈 속 깊이 전쟁 공포감을 갖고 있다’는 지식에 의해 강화되었다−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위기는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통제를 상실할 위험이 없이, 위험을 조작하고 위협을 확대함으로써 이득을 챙길 기회로 간주되었다. 이런 ‘갈등 관리’ 개념은 외교관계에 대한 주지사(미국 주지사)적 접근을 촉진했으며, 정책이란 전략의 적절한 배합이 이루어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될 수 있고 상호 수용의 필요를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조장하였다.

 

결국 억제 도그마는 예방적이고 징벌적인 수단들을 선호하는 독단적·탈정치적 스타일을 조장했으며, 협상을 불신하고, 타협을 나약함으로 간주했다. 소련과 협력하여 세계의 제문제들을 다룸으로써 미국의 이해가 충족될 가능성은 고려에서 배제되었고, 미래의 소련 정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될 장기적 목표의 설계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군비통제

억제 이론은 군비경쟁을 저지하기 보다는 불을 붙였다.

억제론자들은 미국을 파괴하기 위한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안달이 난 악의에 찬 소련을 가정하였고, 미국의 대통령이 쉽게 공갈을 받아 무력하게 될 것으로 가정했으며, 그런 다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평가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생각하였다. 그 답은 항상 ‘더 많이’였다. 그리고 억제의 ‘신뢰성’이 공격 하 발사 능력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안정’은 미국의 2격 능력이 공격에서 살아남을 것을 요구했는데, 2격능력은 훨씬 더 큰 규모의 핵무기 비축을 요구하였다. 확증이론(reassurance)은 상대 측의 확증 2격 능력(assured second strke)을 박탈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양측 다 피한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이런 자기부정(상대의 제2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기체계를 보유하지 않음으로써 상대의 제2격을 스스로 허용하는 행위)을 규율하는 법률(조약)이 부재한 가운데 확증이론(reassurance theory)은 양측이 각자 상대의 제1격을 흡수한 다음 보복할 수 있도록 보증하기 위해 노력함에 따라 군비경쟁을 위한 비결이 되어버렸다.

 

확증론자들(reassurers)은 무기의 총량보다는 상대적 우위에 관심을 두었으며, 어쨌든 많이 보유하는 것이 이론상으로 적게 보유하는 것보다 더 안정적이다. 소련이 핵무기 보유에서 미국을 따라잡았거나 추월했을 때 숫자에 초점을 맞춘 것은 억제론자들이었다. 1960년대 말에 군비통제 정책은 미사일의 숫자를 제한하는 쪽으로 움직인 반면 억제론자들은 탄두의 숫자를 늘려 원래의 우위를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소련이 그 분야에서도 미국을 따라잡자 억제론자들은 다양성의 증대를 통해 상대적 우위를 모색하였다. 그들은 안정을 위한 소요를 재정의하였으며 나아가 신중하게 선택된 계량 단위를 사용함으로써 확증이론을 군비통제 정책이 불신을 받고 또 새로운 공격 체계를 위한 긴급한 소요를 입증시키는데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미국 측의 군비경쟁은 억제 도그마에 의해서만 추동되지 않았으며 또 억제 도그마에 의해 주로 추동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억제 도그마는, 유권자들의 전략적 우위의 포기를 꺼리는 경향과 전략적 군비경쟁이 소련에 손해를 줄 거라는 경제적인 이유 또 전통적인(적절하지는 않지만) 표적 선정 기준의 증가 등을 반영하여 수립된 정책들에 대해서 지적으로 훌륭한 합리화를 수행하였다. 억제 도그마는 또한 미국이 대가치보다는 대병력을, 상호확증파괴보다는 우주의 무장을 선택하는 데서 도덕적 정직을 주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군사 정책

억제 도그마는 군사전략이 전력교환비(적의 전력손실에 대한 아군의 전력손실 비율), 피해 예측, 파괴확율(특정 탄두가 표적을 파괴할 확률) 등 수학의 순열과나 어울리는 개념들로 대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략 논쟁은 억제와 확증의 이론적 정교화의 분야로까지 연장되어 불합리성의 합리성과 강압의 가능성을 숙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교화는 데카르트 논리를 복잡한 정치심리학 문제들에 적용한 것이며, 미국이 베트남에서 찾아낸 것과 같은 나쁜 정치와 나쁜 전략으로 귀결되었다.

 

유럽에서의 논쟁은 억제, 확전, 방화선(firebreaks), 연루와 포기 등의 문제들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이들 문제는 모두 소련의 침략충동에 입각하고 있었다. 반면 소련의 최우선 순위는 세계대전의 재앙을 피하는데 있었다. 만약 세계대전이 불가피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소련의 목표는 전쟁에서 지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런 목표를 위해서는 나토가 유럽에서 패배하고 미국은 유럽대륙에서 쫓겨나야 했다. 나토의 유연반응 교리(1967)는 억제의 신뢰성을 증대시켜 전쟁 가능성을 줄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연반응 교리는 재래식 무기만을 사용한 소련의 전격전에 가능한 기회(만약 전쟁이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면)를 제공함으로써 딱 그 만큼 좀 더 전쟁의 가능성을 높였다. 그에 맞춰 소련은 1969~75년 기간에 전력을 재편하였으며 그러자 나토는 놀라고 경악하였다.

 

억제 도그마는 유혹의 ‘충동’ 구성 요소를 무시하고 오로지 ‘기회’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전략 이론으로서 실패하였다. 똑같은 일이 1970년대에 발생하였는데, 이때 군은 억제의 신뢰성을 갖추기 위해 미국은 장기 핵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70년대 소련이 전쟁을 개시할 유혹은 1950년대—1950년대에는 약 30군데의 소련 도시를 파괴할 정도면 억제력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졌다—와 비교해 훨씬 낮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었음에도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억제 이론의 이러한 오용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핵무기전략가들은 도그마가 군사적 우위를 촉진한다고 생각하면 이용될 어떤 것으로 여기지만 도그마가 거기에 제약이 된다면 무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무기체계의 꾸준한 개발과 작전적 배치는 억제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탄도미사일 부대를 공격하기 위한 공격형 잠수함의 사례처럼 적의 2격 능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무기체계를 피해야 한다는 서로 보완적인 요구는 무시되었다.

 

국제관계

억제 도그마는 군비경쟁을 부추기고 군비통제 협상에 대한 편집증적 접근을 조장함으로써 국제관계를 긴장시켰다. 데탕트 시도는 가차 없는 무기 증강으로 무너졌다 ; 인지부조화의 지시에 복종하였고 위협 인식이 뒤를 따랐다. ‘안정’을 확보하는데 대한 이론적 접근은 위기 속 자기만족을 조장하고 통제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역학 속에 자리한 위험성을 감추었다. 도그마가 오로지 소련의 침공 가능성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도그마는 전쟁 자체가 보다 큰 위험이었던 현실 그리고 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이 자주 전쟁의 가능성을 높였던 현실을 가렸다.

 

도그마의 가장 침식적인 영향은 국제관계의 스타일에서 나타났다. 징벌을 가할 의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똑같이 중요하였고, 심지어 미국이 핵독점을 구가하고 있을 때조차 미국인들은 소련사람들을 핵화장을 당해 마땅한 적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도그마는 국내 유권자들뿐 아니라 적을 겨냥한 과장되고, 훈계조의 수사를 조장하였다. 도그마는 적대감을 진정시키기보다는 더 쉽게 적대감에 불을 붙였다. 위협을 신뢰성 있게 만들 필요가 커지면 억제에 토대한 정책들이 비타협적 행동을 선호하고 진지한 협상과 타협의 모색은 방해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였다.

 

바로 시작부터 핵무기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소련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와 얽혀 버렸다. 억제도그마는 핵무기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놀라운 새로운 능력(핵무기)으로 인해 2차대전 후의 국가 관계(외교관계)를 다루는 방법을 모색하는데서 돌연히 닥친 절박감을 일소해버리고 말았다. 억제도그마가 자신이 예방하려고 하였던 악마보다 더 큰 악마를 위협함에 따라 억제 도그마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공산주의적 노선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다. 여기서 ‘수단’은 소련을 황폐화시키려는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의지이다. 그리고 핵무기 비축량이 늘어간 것처럼 소련에 대한 노골적인 위협 또한 인류 생존에 대한 암묵적인 위협으로 점차 변화해 갔다. 서방측이 총력안보의 망상을 쫓으면서 억제 도그마는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비용은 특별한 환경에 기인할까?

1960년까지 억제 이론의 윤곽이 명확히 결정되었는데, 억제도그마의 영향이 도그마 시작 때의 고유한 환경의 결과인지 어떤지를 물어보는 것이 공정하다.

 

답은 NO다. 왜냐하면 억제 도그마는 대부분 그런 환경과 독립적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기본 개념은 미국의 핵독점과 전략폭격의 문화에서 자라났다. 최근 은퇴한 미 공군 참모총장은 1948년에 수백 평방 마일의 소련의 산업 역량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시기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억제라기보다 예방전쟁이었다 ; 1953~4년까지 핵무기는 유럽을 방어하기 위한 나토의 계획에 통합되었다. 완전히 발전된 핵억제 이론이 정교화 되기 시작한 것은 소련의 핵능력에 의해 미국이 위협을 받게 된 이후부터였다. 이 이론화는 새로운 취약성에 의해 촉발되었으며, 전후 환경의 산물은 아니었다.

 

전후 경쟁하는 사회경제체제의 지도국으로서만이 아니라 잠재적 초강대국으로서의 소련의 출현이 억제 도그마의 징벌적 본성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미래의 유사한 경쟁을 배제하지 못한다.

 

‘위협 관리자’로서의 나토가 소련의 침략 충동과 같은 검토되지 않은 가정에 기여하는 한편으로 억제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충동의 실체는 전혀 이슈가 아니었다. 단순한 침략 가능성이 가정의 핵심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되고 적절한 대응을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핵억제 비용은 핵억제 도그마에 내재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는 또한 미국의 적이 미국과 닮은 꼴(판박이)이 아니라 소련이었다는 점에서 세계로서는 다행스러웠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나토와 달리 소련은 위협을 재평가하였다. 1959년쯤에는 이미 소련은 위험은 더 이상 미국 주도의 자본가 동맹에 의한 의도적인 공격이 아니라 우발전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우발전쟁은 의미상 당연히 억제될 수 없는 것이나 정책을 적절히 배합한다면 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다행스러운 점은 전 세계적으로 핵 포커 게임의 실제 행위자는 단지 두 명뿐이라는 사실이다. 다극적 세계 체제 하에서 사고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안정된 억제가 가능할까?

1950년대 후반까지 이론가들은 핵억제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벌써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핵억제의 불안정성은 양국이 서로를 몇 차례 이상이나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MAD) 후에도 오래 동안 계속된 전략적 군비경쟁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처음에는 그런 불안정성이 기술적 해결책을 요하는 이론적 문제일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불안정성이 심리적 및 정치적 인자들−이들 인자는 무기 프로그램의 특성과 시기의 부조화에 의해 악화되었다−의 함수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예를 들어, 1970년대의 이른바 ‘기회의 창’에 관한 공포는 미래 어느 날 소련이 미국의 지상배치 체계를 무력화시키는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주장과 그 다음 미국 대통령이 인구 밀집 지역에 대한 소련의 위협 때문에 해상배치 체계로 대응하지 못하게 억제된다는 주장에 의거하였다. 소련의 국가이익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하지 않은 채 모스크바는 단 5%의 성공 가능성만 있어도 미국을 무력화하기 위한 공격을 시도할 것이라고 단정되었다. 같은 시기에 이제 억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장기 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상당히 다른 주장도 있었다. 양 주장 다 새로운 무기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전반기의 미국의 위기 행동−그것은 당시 존재했던 상호확증파괴라는 상황에 의거했던 것으로 보인다−은 핵억제가 본성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결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MAD의 변종은 쿠바 미사일 위기―미국에게 크게 유리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시기에도 또한 존재했는데, 그 당시 보는 이 모두에게 위기 안정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은 명확하였다. 쿠바와 1973년 10월의 결정적인 차이는 데탕트가 현실로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안정이 주로 정치적, 심리적 요소들에 의존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일반적 원칙으로서 억제 전략은 위기 불안정−위기불안정이 의지를 입증할 교리적 필요에서 기인한 것이든 아니면 미리 계획된(때로는 자동화된) 결정에서 기인한 것이든−의 주된 원인이었다. 전략은, 전쟁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면 적의 지휘통제를 파괴할 수 있는 아주 정밀한 미사일을 도입하게 하는 촉매의 역할을 하였다. 전략은 적의 선제공격을 단념시키기 위해 중대 위기 시에 조기에 최고의 경계 태세를 채택하도록 권장하였고 그 결과 우발전쟁의 위험을 증대시켰다.

 

핵무기가 평화를 지켰는가?

핵억제의 정치적, 사회적 비용을 감안하면 입증의 책임은 2차 세계대전 이래로 핵무기가 평화를 지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져야 한다. 우리는 핵무기가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핵무기는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침공을 막지 못했는데, 이곳은 모두 소련의 국가안보 구역의 일부였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핵억제가 부재하는 속에서는 소련이 나토유럽을 침공했을 것이고 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재촉하였을 것이라는 협소한 주장을 규명할 책임이 남겨지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려면 첫째, 소련이 유럽을 군사적으로 침공할 충동과 능력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둘째, 소련의 군사적 침공은 재래식 전쟁의 전망(핵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전망)에 의해서는 억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두 번째 측면은 본질적으로 믿기 어렵다. 2차 세계대전으로 입은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의 황폐화를 볼 때 전리품으로 챙기게 될 황폐화된 유럽이 (전쟁) 비용을 보상해줄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전쟁이 소련의 다른 목표들, 가령 소련본국의 힘과 번영의 복원, 소련의 세계적 영향력의 향상,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촉진 등에는 어떤 효과를 초래하였을까?

 

첫 번째 측면은 두 번 째 측면과 비교해 입증하기가 더 쉽지는 않다. 첫째 만약 소련이 영토 확장 충동을 가졌다면 왜 소련은 2차 세계대전 뒤에 그렇게 많은 전략적 지역으로부터 자국 군대를 철수시켰을까? 둘째, 소련이 전쟁을 일으킬 유인은 있었는가? 추축국 침략자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소련은 1918~21년 사이에 상실한 영토를 되찾았으며, 옛 제국의 경계선을 회복하였다. 1947~48년 동안−모스크바가 자본가에 의해 시작된 전쟁(제2차세계대전을 의미?)의 보다 직접적인 위협을 5년 사이(1945∼1950년을 말하는 듯함:역자주)에 인식하게 된 때다−사실상의 전선은 소련 영토의 서쪽으로 500마일 떨어져 있었고 또 서유럽의 가장 좁은 지역과 만나고 있어 동유럽을 군사적 및 이념적인 둑(방패)으로 만들기가 더 쉬웠다. 셋째, 소련은 전쟁을 할 만한 능력이 있었을까? 1946~7년 사이에 미국의 위협 평가가 소련을 군사적인 세계 지배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을 때 소련은 자국 국민을 거의 먹여 살릴 수 없었고, 러시아 내 철도 체계의 복원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독일 철도의 복선을 철거하는(복선 철도인 경우 한 쪽 철도를 철거하여 소련으로 반출한다는 의미: 역자 주) 응급조치를 채택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1947~53년 사이(이 기간은 상호 위협 인식이 동서 간 대치로 구체화된 시기)의 소련의 능력과 의도에 대한 서방의 묘사에 의문을 던지기에 충분하다. 이런 ‘최악의 경우’의 가정은 그 당시 서방의 대유럽정책을 구체화하였던 군사적 우발계획의 기초로서는 정당화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동일한 가정들이 ‘진실’로 승격될 수는 없으며 나아가서 핵무기가 과거에 평화를 지켰으니까 미래에도 그런 목적을 위해 보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용될 수는 없다.

 

핵무기 없는 세상을 향한 노력 : 억제에 대해서 어떤 역할이 필요한가?

이 글의 주장은 핵억제가 평화를 지켰다거나 아니면(최악의 경우에) 소련의 침공 가능성에 대한 무료의 방지책이었다는 서방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의 결론은 전략으로서의 핵억제에 대한 많은 학문적 분석에 의해 지지받고 있다. 예를 들어 Lebow와 Stein은 “냉전의 역사가 무제한적인 핵억제의 추구의 치명적인 결과에 대해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공한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1994년에 발행된 그들의 저서(250쪽의 인터뷰와 자료 메모를 근거로 한 375쪽 분량의 실증적 분석)의 한 결론이지만 핵억제 이론에 대한 근거가 확실한 비판은 1950년대의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핵억제의 미덕과 끊임없이 늘어나는 핵무기 비축의 장점에 대한 지속적인 대중 교육이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학계 전반에 걸쳐 설득력 있는 비판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1980년대 동안, 데탕트 붕괴와 핵교리의 붕괴, 미국의 의도적인 대소 대결 정책 채택 등에 이어서, 억제론에 대한 비판의 양이 20~30년 전의 증거들을 토대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 분석(비판)은 심리적 연구 결과뿐만 아니라 실증적인 정치 분석에 근거하는 가운데 상세한 핵정책으로부터 시작하여 국방과 외교정책의 구성 원칙으로서의 억제의 역할로 옮겨 갔다. 이런 입장을 갖는 분석들 가운데는 핵억제보다는 재래식 억제에 초점을 두면서 억제 이론의 밑바탕에 있는 가정들 특히 정보와 통신, 합리성의 정의, 그리고 동기의 문제에 관한 가정들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있었다. 대체적인 의견은 서방의 억제 전략이 결함이 있는 상호작용의 모형 즉 분석적으로 취약하고, 정치적으로 조잡하고, 규범적으로 편향되어 있는 모형에 토대하고 있다는 것에 모아졌다.

 

대부분의 분석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는 억제 기반의 전략이 갖는 편향성인데 이 전략은 단 하나의 정책수단 즉 징벌을 강조한다. 이러한 편향은 적에 대한 고정관념−이런 고정관념은 동기에 관한 선입견적 가정과 모순되는 증거들이 나와도 상관하지 않는 본질적으로 부정직한 모형이다−을 항상 강화하고 때때로 생성해 내기조차 한다. 이런 편향의 영향들은 분석이 재래식 억제에서 핵억제로 옮겨가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특히 이런 비판의식이 내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핵무기 보유국들이 ‘핵무기 없는 세상’과 같은 정책 목표를 채택하고 이 목표 달성을 위해 명확히 규정된 절차를 지킨다면 핵억제가 할 역할이 있을지에 관한 검토에 착수한 것이다.

 

통상적인 용어로, 뭔가의 행위가 억제된다는 것은 암벽과 같은 곤란일 수도 있고 어떤 재화의 가격일 수 있고 군사적 방어 차원일 수도 있고, 법을 위반한 형벌일 수도 있는데 그 잠재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방의 말투로 강조점이 수동적 모드에서 능동적 모드로 옮겨 갔으며, 개념은 의인화되었다. 정치학자들이야 도전자와 방어자(정치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사용법)에 관해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억제가 정책 입안자들과 대중들에게 떠올리는 이미지는 치안판사와 범법자의 이미지이며, 후자는 오로지 극형의 위협에 의해서만 억제된다.

 

바로 이런 서방의 의식(자신은 치안판사로 상대는 범법자로 보는 의식)에 비추어 볼 때 핵억제개념은 핵무기보유국들이 점진적으로 자신의 핵무기를 제거해 가는 과정에 전적으로 부적당한 것이다. 핵무기의 제거 과정이 성공을 거두려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하고, 집단안보와 협력안보와 같은 개념이 수반되어야 한다. 모든 당사자들이 공동의 목적을 공유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에 불일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징벌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정치적, 경제적 협정을 수반하는 협상을 통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가정으로 되어야 한다.

 

만약 이 과정에 핵억제가 등장하게 되면, 억제가 태생적으로 불화를 가져 오듯이, 이 과제는 필히 실패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내 유권자들−유권자들은 검증이 진실로 효과적이라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현재의 무기 균형과 우위가 단계적인 감축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수용하도록 재교육될 필요가 있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핵 억제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만 한다.

 

또한 서방의 핵억제 개념은 미국, 소련, 중국이 그들의 남아 있는 핵무기를 제거할 최종 단계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는, 3명의 총잡이가 자신들의 무기를 없애자는데 동의하였지만 무기를 없애는 과정에서 총에 맞는 것을 피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잘 무장하고 중립적인 보안관이 속임수를 억제해 주었으면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흔히 하는 말로, 가능한(possible, 있을 수 있는) 혜택이, 예상되는(probable) 비용은 차치하고라도 확실한(certain) 비용(필요불가결한 비용의 의미로 probable한 비용보다는 적다-역자 주)에도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세 나라 어디든 다른 두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억제될 것이다.

 

결론을 내리며

이론상으로는, 핵무기를 폐기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핵억제 도그마가 전쟁을 막은 것이 아니라 실제 전쟁가능성을 더 높였다는 증거에 의해서 강화되어야 한다. 실제상으로는, 핵억제와 평화 간 연계가 지금 서방인의 사고 속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는 결과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목표는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만큼이나 크게 유권자의 재교육에 달려 있을 수 있다.

 

재교육은 책임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대한 지성과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억제 도그마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들의 통찰력은 193~40년대에 한정되어 있었다. 소련의 의도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그리스 내전, 프라하 쿠데타, 베를린 봉쇄, 사회주의 중국 수립, 한국전쟁 등에 의해 정해졌다. 그들은 뮌헨(굴욕적 양보를 뜻함)의 안경을 쓰고 상황을 보면서 3차 세계대전이 소련의 침략으로 발발할 것으로 믿었으며, 1930년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들은 핵무기가 이전에 사용되었던 그 어떤 무기와도 질적으로 다르다고 평가하는 이례적일 정도의 총명함이 있었다. 그들은 핵억제 개념을 개발하면서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과 이 무시무시한 새로운 능력(핵무기)의 본질적 위험 두 가지 모두를 봉쇄하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유권자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아주 기꺼이 이러한 주장들을 수용했으며, 그리고 그 개념은 지적 신경안정제로 작용하였고, 점차 정교해지는 논리는 잘못된 확신감을 주었으며, 도그마의 기저 가정에 도전하려는 시도를 방해했다. 신흥 도그마는 서방의 사고에 완고한 틀을 강요하였고, 우리의 세계관이 새로운 정보와 보다 적절한 사후 판단을 따라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냉전 초기에 이용가능한 제한된 증거에 의거해 도달한 판단이라는 점에서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이제 우리는 50년간(이 글을 쓴 1996년 기준으로 1945년부터의 기간의 자료)의 통찰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핵억제 전략 및 그 기본적 가정을 옹호하는 주장들을, 실증적 및 이론적 근거에 의거하여 비판하고 있는, 여러 학문이 참여한 연구(cross-disciplinary)가 상당한 양으로 이미 존재한다. 억제 도그마가, 이것이 발전하면서,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결딴이 났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다. (끝)

 

--------------------------------------------------------

보조자료: 용어에 대한 이해(수기에 에이이치의 글 발췌 번역)

 

억제론자들은 핵억제를 징벌적(보복적) 억제와 거부적 억제로 구분한다. 보복적 억제란 적이 공격을 감행하면 적의 도시·산업시설에 괴멸적인 보복(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위협함으로써 적의 공격을 사전에 단념시키는 것을 말한다. 거부적 억제란 공격과 방어 양 측면에서 적의 공격목표 달성을 거부하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목표 달성에 드는 비용을 적이 인식하도록 하여 공격을 단념시키는 것을 말한다.

 

미․소의 핵전력은 모두 상대에게 괴멸적 타격을 주는 능력을 갖춘 이래(대체로 60년대 이래) 억제론의 주류는 징벌적 억제가 되었다.

 

억제는, 보복위협으로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수단이고 핵 보복의 위협에 의한 징벌적 억제가 억제의 진수로 간주되어도 좋다.

 

미․소(쌍방이)가 충분한 징벌적 억제력을 보유한 단계를 표현하는 것이 <상호억제>이고 <상호확증파괴>(MD)의 공포다.

 

<상호확증파괴>란 쌍방이 상대의 보복공격에 의한 괴멸적 파괴를 두려워해 선제공격을 삼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을 의미한다.

 

<상호억제>란 ① 상대의 제1격에 의해서 아측의 보복(제2격) 능력은 파괴되지 않지만(보복능력이 생존하지만) ② 사회(=도시)는 상대의 공격에 의해 쉽게 괴멸적 파괴를 당한다고 하는 2개의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 성립한다.

 

먼저 공격하는 측도 보복공격을 하는 측도 모두 국가=사회로서는 생존할 수 없다. 는 ‘공포의 균형’ 체계 하에서는 <상호취약성이 억제의 핵심>이다. 그 때문에 <전략적 안정> 즉 억제의 안정이란 미․소 양쪽이 <확증파괴>의 전략개념을 수용하고 서로 상대의 핵공격에 대해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 성립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방어를 원칙적으로 포기할 필요가 있다.

 

1972년에 체결된 ABM조약이 ‘상호확증파괴’의 확인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것은 미소가 핵전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고 미소간 핵군비통제의 기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호확증파괴>의 인정을 통한 억제의 안정은 다음 2가지 이유로 본질적 결함을 피할 수 없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소련이 <상호확증파괴>의 전략개념을 수용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의심을 언제나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련이 전쟁수행능력과 전략적 방어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그렇다고 하면 미국 또한 전쟁수행능력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역 또한 진실에 가깝다.

 

② 상호억제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는 쪽도 선제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선제공격할 것이라는 공포는 정책결정자에게 끊임없이 ‘선제공격을 해야하겠다는 압박감’을 준다. 상호억제의 기반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또 불안정하다. 그 때문에 ‘상호확증파괴’ 결국 ‘징벌적 억제’를 보완하는 것으로서 또는 그것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거부적 억제’ 전략이 부상한다. 그러나 ‘피해한정’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거부적 억제’는 방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격적 수단에 의해 적의 공격력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것도 포함한다. 이를 위해서는 (핵공격을 전제로 하면)적의 미사일이 발사되기 전에 적의 미사일 기지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발사 후의 미사일 사일로를 파괴하는 것은 무의미) 대병력전략이라고도 이야기되는 이 전략은 확증파괴(대도시전략)에 못지않게 위협적이다. ‘징벌’이건 ‘거부’이건 억제는 언제나 ‘위협’ 요소를 피할 수 없다. ‘위협’이야말로 전쟁의 발생을 막고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이 핵억제전략의 핵심이다.

먼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세요.

창닫기확인

평화·통일 연구소 / 주소 : (03751)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5길 27(충정로3가)2층
전화 : 02-711-7293 / 후원계좌 : 농협 301-0237-0580-71 평화통일연구소
누리집 : www.rispark.org / 이메일 : rispark04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