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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 이집트군의 폭주에 곤혹스런 ‘주인’ 미국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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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견’ 이집트군의 폭주에 곤혹스런 ‘주인’ 미국
 
 
TV나 일부 신문은 7월 3일 일어난 이집트 군의 정권 탈취를 ‘사실상의 쿠테타’라고 석연치 않은 표현으로 보도하였다. 군이 대통령을 구금하고 헌법을 정지시키고 여당인 자유공정당이나 이슬람형제단 간부 300명의 체포를 시작하고 텔레비전방송 6개국을 폐쇄하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은 ‘명백히’ 쿠테타였다. 이것을 ‘사실상의’라고 말한다면 앞으로 범죄를 보도할 때도 ‘사실상의 강도사건’ 따위로 말해야 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미묘한 표현
 
이처럼 괴상하게 조심스런 표현을 한 것은 미국 정부가 이집트 군의 행동을 비난하면서도 ‘쿠테타’라는 말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을 추종하는 일본 언론의 경향이 잘 드러난다. 이런 식의 보도는 일본 언론이 NSA(미국가정보국)의 세계적인 도청, 컴퓨터 해킹 등을 내부고발한 스노든을 ‘용의자’라고 표현한데서도 드러난다. 그런 식이라면 미국 등으로 망명하는 사람들도, 자기나라에서 위법행위의 혐의가 나오면 ‘용의자’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나 표현을 일본 언론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은 비굴한 태도다.
쿠테타 발생 직후 오바마 대통령은 “무르시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헌법을 정시시킨 이집트 군의 결정을 매우 우려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무르시나 지지자를 불법으로 구속하지 말고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정부에 조기에 권력을 이양할 것, 평화적 집회나 자유롭고 공정한 재판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이집트 군에 요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쿠테타’란 단어를 피하고, 선거로 집권한 무르시 대통령측에 정권을 ‘돌려주라’라고 말하지 않고, 정권의 ‘이양’을 말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쿠테타를 인정하면 이집트 특히 그 군대에 대한 원조는 미국 국내법으로 불법이 되며, 극히 친미적인 이집트 군은 부품이 미국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거의 행동불능 상태가 된다. 또 만일 무르시 대통령이나 그 모체인 이슬람형제단이 정권을 탈환하면 많은 군인이 반란죄로 처형될지 모르고 미국은 30여년간 육성해 온 애견, 이집트 군을 잃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집트 군의 장비는 거의가 미국제
 
이집트 군의 장비를 보면 그 대미 종속이 분명해진다. 전차 2,497대 중 미육군이 현재 사용 중인 전차와 같은 최신의 M1A1이 1087대, 약간 구식인 미국제 M60A2 및 M60A3가 1,150대로 합쳐서 2,237대가 미국제다. 독일 육군의 전차보유가 322대, 이스라엘이 480대이므로 이집트 군의 보유대수가 월등히 많다. 구소련제인 T55와 T54전차를 이집트에서 개조, 현대화한 ‘람세스2세’ 전차도 260대 있는데 훈련용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그밖에도 구소련제 전차 1,300대가 보관상태로 남아있다. 전차부대와 함께 사막을 자유롭게 달리는 캐터필러(무한궤도)식의 장갑병력수송차도 2,000대 모두가 미국제 M113과 그 조립형이다. 공격헬리콥터도 미국제 AH(아파치) 35대, 대형수송헬기도 미국제 CH47(치누크) 19대 등 미국제가 주력을 이룬다.
공군은 전투기 392대 중 미국제가 226대(F-16A/B가 32대, F-16C/D가 165대, F4E가 29대)이며 프랑스제 미라주계열이 67대, 구소련과 중국제 미그21이 100대 남아있다. 미국은 대형레이더를 달고 적기의 침입을 발견하는 조기경보기 E2C도 8대를 제공하는 등 이집트 군은 강력한 공군으로 성장하였다. 해군은 호위함 10척이 주력이고 그 중 4척은 미 해군도 현재 사용 중인 O·H페리급(3,638톤), 2척은 구식의 미국제 녹스급(4,260톤)대잠호위함, 그밖에 중국제 2척, 스페인제 2척이 있다.
 
 
소련 의존에서 미국 의존으로
 
이집트는 나세르 대통령 때(1956〜70년)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을 둘러싸고 영국, 프랑스와 대립하였고, 소련의 원조를 얻어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하고 군의 장비도 거의가 소련제였다. 하지만 1970년 나세르 대령의 돌연한 사망으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에 오른 사다트가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을 상대로 선전한 뒤 미국과 이스라엘에 접근하였다. 사다트는 1976년에는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파기하였고 1978년에는 카터 미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과 평화조약 체결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하였다. 사다트와 베긴은 197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79년에는 평화조약에 서명하였다.
미국 정부는, 550만명의 유대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이집트가 소련과 손을 끊고,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화해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은 행운이었다. 그 대가로 미국은 1980년 6월 “Peace Vector”(평화지향의 거래)라 이름을 붙인 대외군사판매(FMS)를 하기로 하고 당시 최신전투기인 F16(1979년 1월 미공군에 막 배치되기 시작했다)을 우선(1차로) 40대를 이집트에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1981년에 집권한 레이건 정권은 1979년 혁명으로 반미로 돌아선 이란을 대신하여 이집트를 ‘중동의 헌병’으로 육성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원조단을 파견하여 대량의 전차와 항공기, 군함을 아낌없이 제공하고 교관을 보내 이집트 군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많은 이집트 군 장교를 미국의 군사학교에 유학시켰다. 그 이후 30여년에 걸쳐 미국이 쏟은 군사 원조의 결과 이집트 군은 미국제 장비를 갖춘 강대한 친미 군대로 성장하였다.
사다트 대통령의 이스라엘과의 화해와 미국 접근은 이집트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이었을 수 있다. 1973년 이래 40년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집트는 다른 아랍국가로부터 ‘배신자’로 간주되어 일시 고립되고 이집트 국내에서도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1981년 10월 사다트 대통령은 군의 사열을 받던 중 이슬람 강경파 장교의 테러에 희생되었다.
 
 
기득권 박탈의 위기감을 느끼는 이집트 군부
 
이 암살사건 뒤 부통령에서 대통령에 오른 무바라크 공군원수는 사다트 노선을 이어받아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래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반환받기로 1982년에 이스라엘과 합의하였다. 1991년 걸프전 때는 다국적군에 참가하였고 외자를 도입하여 경제도 성장시켰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우파세력이 커져 아랍인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하게 되면서 무바라크 대통령의 친미 및 친이스라엘 로선은 국내에서 반발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미군이 2010년 8월에 이라크에서 전투부대를 철수시키고 이라크전쟁의 실패가 분명하게 되자 다음 해 1월 튀니지 정변을 시작으로 중동의 친미독재정권은 차례로 붕괴되었다.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도 말기에는 친미로 기울었다. 소련군이 1988년 5월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시작하고 소련의 패배가 명백히 되자마자 헝가리, 폴란드에서 친소독재정권이 흔들리고 다른 동유럽국가에 영향을 미쳐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대되고 민중이 내무부의 치안부대(경찰군)와 충돌하는 가운데 군은 중립을 표명하고 민중의 존경을 얻었다. 2011년 2월 무바라크 사임 뒤 군의 최고평의회(장성 18명)가 잠정통치를 맡아 민정이양을 추진하였다. 2012년 5월에 첫 민주적인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고 거기서 당선된 이슬람형제단 출신의 무르시에게 정권을 인계하였다. 여기까지 군의 행동은 현명하였지만 군은 그 뒤에도 입법권이나 예산통제권을 계속 장악하려고 하였고 헌법개정, 재개정 문제에서 무르시 정권과 대립하였다.
민간인 대통령이 군사령관들을 차례차례 갈아치운 문민통제에 대한 군부의 반감에 더해 군이 경영하는 기업 문제도 있다. 이집트군은 제조업, 농업, 서비스업 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업을 경영하고 그 규모는‘GDP의 30%정도’라고도 한다. 사업이익은 의회가 인정하는 예산과는 별도이며 장군들의 추가소득원이 되기도 하고 (퇴역뒤의) 낙하산 자리로 되고 있다. 군은 무바라크가 퇴진한 2011년 초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사이에 ‘120억 이집트파운드’(약 17억달러)를 정부에 상납하였다’고 자랑하고 있다. 군인은 이런 특권이 무르시정권에 의해 점차 박탈되는듯한 모습에 초조함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경제의 정체와 인플레에 시달리는 대중이나 이슬람색이 짙은 신헌법에 불만을 갖는 자유주의성향의 반무르시 활동에 편승해 선동하고 반무르시 시위의 참가자 수를 과장해서 발표하는 등 쿠테타를 정당화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어려운 선택에 처한 미국
 
하지만 이집트 군으로서는 쿠테타를 일으킨 결과 만일 미국의 군사원조가 중단되면 치명적인 상태가 된다. 이집트의 2013년 국방예산은 263억 이집트파운드(약37억달러)이고 거기에 덧붙여 미국으로부터 매년 받는 군사원조가 13억달러다. 미국 원조가 국방 예산의 35%에 해당될 정도로 크다. 원조의 대부분은 항공기, 전차, 함정 등의 부품이며 특히 전투기, 공격헬기 등의 부품은 고가인데다가 일정한 비행시간이나 착륙회수 등에 따라서 부품교환이 결정되고 있다. 부품을 입수할 수 없으면 전력은 급격히 저하된다. 미국으로서도 부품공급이 이집트군을 통제하는 고삐인만큼 부품공급이 정지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다른 한편 미국이 쿠테타를 묵인하고 군사원조를 계속하는 것은 미국내의 비판을 초래한다. 더욱이 이집트에서 군사정권이 부활하든가 아니면 겉으로 자유주의파의 정치인을 내세우고 군이 실권을 쥐는 허수아비정권이 들어서면 반정부파가 시위를 벌여 혼란이 장기화되고 테러활동도 일어나 마침내 내란으로 발전할 우려도 있다. 7월 8일 카이로에서 치안부대가 시위대에 발포하여 51명이 죽은 사건은 내란의 위험을 고조시켰다.
이슬람형제단(약100만명)은 조직력이 강하고 복지활동으로 민중의 신뢰를 얻고 있으며 쿠테타를 비판하는 것도 충분히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이번 반무르시행동에 참가한 자유주의파도 군이 쿠테타에 의해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사정권이 부활하는데는 비판적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 군은 병력이 43만 8,500명이며 이중 육군이 31만명이고 약 30만명은 징집병(이중 육군이 20만명)으로 병은 대체로 일반민중의 정서를 반영한다. 청년장교 중에도 군상층부의 부패나 친이스라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않다고 한다. 내무부의 치안부대는 32만명 이상이며 이는 경찰군이니만큼 반정부활동의 탄압이 주임무이고 2011년의 반무바라크시위를 탄압하였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미국은 이라크로부터 2011년 12월에 완전히 철수하였고, 아프가니스탄의 치안임무도 2013년 6월 18일 현지에 맡기고 겨우 발을 뺀다는 목표를 세우고 ‘(미국의) 재정재건, 수출2배증가’의 목표를 향해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이집트에서 쿠테타가 일어난 것은 미국에게 귀찮기 그지 없을 것이다. 친미군사정권 또는 군의 허수아비정권을 지원하게 되어 장기화 양상인 혼란에 휘말리게 되어서는 큰 일이다. 하지만 지난 30년 이상 육성해 온 이집트 군을 내버려두고 혼미 끝에 비교적 온건하였던 이슬람형제단 이상으로 이스라엘에 강경한 정부가 이집트에 생겨나게 되어서도 곤란하다. 군의 허수아비가 아니고 이슬람형제단과 화해할 수 있는 정권의 탄생을 미국이 기대하는 것은 미국의 이해상 당연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 일본 군사평론가인 타오카 순지가 2013년 7월11일에 DIAMONDonline에 기고한 글을 평화통일연구소가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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